6.25 포로에 대한 이야기…
Saturday, June 26th, 2010아주 재미 있던 글이였다.
물론 그 때는친공파를 싫어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분한이 유엔의 추장하는 선거를거부했고 전쟁을 시작했다.남-북둘다 잔인하게 전투를 했으니 이런 상태 기대할수 있어.
제일 중요한 사실은 바로 지금 보이잖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이고 북한은 후진국 중에 후진국이다.
친공과 반공의 칼날 위에 서 있던 전쟁 포로. 그들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이념 대결의 틈바구니에서 가장 큰 희생양이었다.
6·25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적국의 포로를 송환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정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에서 포로 문제는 이념 대결로 비화되면서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현재진행형이다.
인민군 출신으로 1951년에 광주 포로수용소에 끌려갔던 김성갑(85)옹은 그곳에서 포로들을 상대로 군사재판을 열어 무더기 처형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증언했다.
“그저 막 붙들어다가 조사하는데 나도 죽을 뻔했어. 꺽대 자루로 피가 날 때까지 두드려 패는데 많이 죽었어.” 김 씨의 증언처럼 그 당시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인민군 포로들은 남측의 골칫거리였다.
특히 51년 8월부터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전쟁포로에 대한 재판을 일부 도입하라고 허용하자 포로수용소 곳곳에서 군사재판이 열려 포로들이 대거 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이 끝난 뒤 포로 문제는 한층 복잡한 양상을 띤다.
남측에 억류된 공산군 포로는 17만여명인데 반해 북측 유엔군 포로는 10만명에 불과해 수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났다.
북측은 ‘전원송환’을 주장한 반면 많은 포로를 한꺼번에 북에 보내는 것에 부담을 느낀 남측은 반공포로를 전면에 내세워 “원하는 사람만 교환하자”는 ‘자유송환’을 주장한다.
이때부터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와 친공포로 캠프가 철저히 분리됐고 수용소 안에는 살육이 난무하는 피 튀기는 이념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었던 이찬근(80)씨는 반공과 친공을 나누는 과정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포로 교환 될 때도 자기 의사 표현을 못했어요. 의사 표현하면 두드려 맞으니까. 이북으로 간다고 하면 그런 현상이 벌어졌죠.”
실제 유엔군은 포로들을 반공으로 전향시키기 위해 유엔군사령부 안에 ‘민간정보교육국’을 설치하기도 했다.
반공을 선택한 포로들은 이를 입증하기 위해 ‘반공’이라는 문신을 새기거나 혈서를 쓰게 했으며, 심지어 원치 않는 포로들에게도 문신을 강요했다고 전해진다.
결 국 17만명으로 추정되는 포로들 중 지금까지 북으로 송환된 포로는 반에도 못 미치는 8만 8천여명. 휴전 협상 막바지에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들을 일시에 석방하면서 2만 7천여명이 한꺼번에 풀려났지만 이후에도 이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차별과 감시 속에 살았던 반공포로들은 경찰이나 군대에 들어가 반공임을 스스로 입증하거나, 아니면 빨갱이로 낙인찍힌 채 살아야했다.
포로 문제를 연구해온 전갑생 한국제노사이드연구원은 “한국 전쟁에서 포로들은 양쪽 체제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철저히 이용됐다”면서 “한반도에 독특한 포로 정책이 만들어진 배경, 그 과정에서 포로들이 입었을 상처를 이해하고 남은 문제를 해결할때만이 전쟁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